[럭셔리] 리모와 여행 가방 - 세월을 담는 여행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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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리모와 여행 가방 - 세월을 담는 여행 가방
  • by 정규영
더기어 연재 '럭셔리' - 2년 마다 신제품을 사야 하는 게 지쳤다면 대를 물려줄 제품들을 만나보세요. 시간을 담은 제품들을 소개하는 연재입니다.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워보이 들은 제 목숨을 걸기 직전 전사들의 천국 ‘발할라’를 외치며 입가에 크롬 스프레이를 뿌린다. 새로 생산한 물건이라곤 어디에도 없는, 모든 것이 낡고 녹슬어버린 매드맥스의 스팀 펑크 세계에서 은색으로 찬란하게 번쩍이는 크롬은 동경의 대상이자 구원의 증표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고물이 다른 누군가의 보물이 되는 빈티지 애호의 세계도 그와 비슷하다. 온통 깨끗하게 반짝거리는 물건으로 가득한, 눈만 뜨면 새로운 기능을 갖춘 신제품이 등장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사람들은 근사하게 낡은 물건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쉽게 찌그러져 금세 낡아 버리는 리모와(Rimowa)의 알루미늄 여행 가방이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과 단순한 디자인에도 오랜 세월 독자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행선지를 알리는 스티커가 수월하게 떨어지지 않는 재질 탓에 여기저기 스티커가 붙어 있는, 적당히 낡은 리모와 트렁크는 경험 많은 여행자의 상징이 되었다. 트렁크에 붙이는 스티커를 따로 판매할 정도. 리모와 애호가들은 공항에서의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의 트렁크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스티커와 군데군데 찌그러진 상처를 통해 독특한 동질감을 공유한다.



리모와 역시 처음엔 전통적인 소재로 가방을 만들었다. 1898년 파울 모르스첵(Paul Morszeck)은 독일 쾰른에 여행용 트렁크를 만드는 회사를 설립한다. 가죽과 나무라는 소재는 일반적이었지만 기존 트렁크보다 더 가볍고 튼튼한, 기능적으로 뛰어난 제품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20세기 초반 항공 여행의 대중화와 함께 사업이 번창하던 와중, 가방을 제조하던 공장에 큰 불이 난다. 주요 재료인 나무와 가죽은 다 타버렸지만, 화재 현장에 멀쩡하게 남아있던 금속 소재 부속품들이 창업주의 눈에 띄었다. 화재 즈음 회사에 합류한 2대, 리처드 모르스첵(Richard Morszeck)은 아버지와 함께 금속을 소재로 한 가방 개발에 착수, 1937년 세계 최초로 알루미늄 트렁크를 개발했다.



위 사진이 최초의 알루미늄 트렁크다. 리모와라는 브랜드 이름은 리처드 모르스첵과 트레이드마크를 뜻하는 독일어 ‘Warenzeichen’의 앞 두 글자씩을 더한 것이다.
 


리모와가 지금과 같은 디자인의 가방을 선보인 건 1950년이었다. 그 전엔 지금과 같은 반복되는줄무늬 패턴이 없었다. 경금속인 알루미늄을 소재로 선택한 건 가방의 무게를 줄이는 데 집중했던 선대의 노력을 이어받은 결과였지만 가벼운 만큼 강도가 약했다. 리모와는 알루미늄의 단점을 열처리와 표면 성형을 통해 상당 부분 극복했다. 가열과 급속 냉각을 반복해 강도를 높이고 프레스 롤러에 넣고 이동시키며 가는 요철을 만들어 쉽게 휘지 않도록 한 것. 표면의 굴곡으로 쉽게 미끄러지지 않아 운반하기도 더 편해졌다. ‘그루브(Groove) 패턴’이라고 불리는 리모와의 상징적인 줄무늬는 철저히 기능적인 고려로 탄생했다. 현재까지 리모와의 간판 라인인 토파즈(Topas) 역시 같은 해 등장했다. 토파즈는 항공기에 주로 쓰이던 알루미늄과 구리, 마그네슘 합금인 신소재 두랄루민(Duralumin)을 최초로 사용한 트렁크였다. 당시 리모와의 트렁크는 독보적으로 가벼웠고, 튼튼했으며 또한 실용적이었다. 그렇게 리모와는 장거리 여행객과 항공기 승무원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특징적인 그루브 패턴 외에는 시각적인 요소를 거의 더하지 않은, 단순한 디자인을 유지한 채로 리모와의 혁신은 계속되었다. 1976년엔 최초의 방수 트렁크를 개발했고, 2000년엔 최초의 폴리카보네이트 소재 캐리어 살사(Salsa)를 탄생시켰다. 보다 가볍고 단단하며 휘어져도 즉시 원상태로 복원되는 폴리카보네이트는 트렁크 소재로선 알루미늄 이래 가장 획기적인 물질이었다. 알루미늄과 달리 다양한 색상을 선명하게 입힐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이후엔 세부에 집중했다.


2001년엔 사무실 의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바퀴가 4개인 멀티 휠 시스템을 개발해 무거운 캐리어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도록 했고, 2006년엔 미국 교통안전청이 개발, 승인한 TSA 잠금장치를 장착해 자물쇠 파손 걱정 없이 미국 공항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눈에 띄는 가장 최근의 혁신은 스마트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백투고(Bag2Go)로 공항에서 환승과 도착 이후에 스마트폰을 통해 가방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술이다. 에어버스와 함께 개발해 곧 상용화될 예정, 리모와 트렁크를 부러워할 이유가 하나 더 늘겠다. 



 
현재, 실용적인 면에서 리모와는 과거만큼 독보적이진 않다. 더 가볍거나, 더 튼튼한 트렁크를 더 저렴한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다(물론 리모와 애호가들은 이보다 더 가벼우면서 튼튼한 트렁크는 없다고 주장하겠지만). 실제로 여행 트렁크 시장에서 리모와의 점유율은 0.6%에 불과하다. 80%이상이 저렴한 중소규모 로컬 브랜드의 제품인 걸 고려하더라도 주요 경쟁 브랜드인 샘소나이트의 9.6%, 투미의 1.6%에 비하면 다소 초라한 수치다. 공항의 풍경, 특히 국제선 터미널을 떠올려 보자. 아무리 생각해봐도 리모와의 큼직한 하드 케이스를 자랑스럽게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0.6%보다는 더 많지 않았나? 리모와를 모방한 제품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한번 구입한 제품을 오래 쓴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애초에 리모와는 제품을 그리 많이 생산하지 않는 브랜드다.

3대째 가족 경영을 이어온 리모와의 현 회장이자 창업주의 손자인 디터 모르스첵(Dieter Morszek)은 인터뷰에서 “단순함을 지키는 건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타 브랜드와 달리 여행가방 외엔 다른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지 않았고, 생산 공장 역시 독일과 체코, 미국 외엔 더 이상 늘리지 않고 있다. 지금도 200여 개의 부품을 생산, 조립하는 90단계 이상의 공정에서 수작업을 고집한다. ‘수작업과 하이테크의 만남’이라는 모토가 더 없이 선명하다. 그렇게, 리모와라는 브랜드의 존재감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글 : 정규영, 편집 : 김정철 - 이 글은 컬럼니스트의 의견으로 더기어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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