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티볼리 오디오 '모델 원' - 오디오를 지우고 음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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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티볼리 오디오 '모델 원' - 오디오를 지우고 음악을 남겼다.
  • by 고다르
더기어 연재 '레트로' - 과거 우리를 열광하게 했던 제품들을 다시 돌이켜 보는 연재입니다. 어떤 제품은 멋졌고, 어떤 제품은 이상했습니다. 

1981년 8월 1일 오전 12시 1분. 미국에서 MTV가 개국하면서 첫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첫 곡은 버글스(Buggles)의 " Video Killed the Radio Star "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
그러나 라디오는 TV시대, CD시대, 뮤직 비디오 시대를 관통하며 버텨왔다. 그리고, 그 시대를 모두 관통하며 55여년을 발전해 온 위대했던 라디오 하나가 있다. 바로 티볼리 오디오의 모델 원(Model One)이다.


2000년 출시된 모노 라디오


모델 원은 2000년 처음 출시됐다. 역사는 겨우(?) 15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품에는 55년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 그 역사는 뒤에 다시 얘기하고 먼저 모델 원이 출시되던 2000년대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라디오는 그야말로 라디오다. CD 트레이도 없고, 테이프도 들을 수 없었으며, 초기 모델에는 AUX 연결조차 없었다. 미칠듯이 심플한 나무 박스에 볼륨, FM/AM 셀렉트, 주파수 다이얼 밖에 없었다. 디지털앰프가 유행하고, 수십 개의 포트와 12.2 채널까지 지원하던 시대에 티볼리 오디오는 라디오만 나오는 황당한 스펙과 모노 스피커 유닛으로 출시됐다. 과연 이 라디오가 팔릴 수 있었을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재미있는 모습이 보였다. 

현재의 용산은 파리만 날리지만, 그 당시에는 고가의 수입 오디오를 취급하는 전문점들이 꽤 많았다. 매장 안에는 엄청난 크기에, 엄청난 출력에,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 오디오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가게 주인장들은 거대한 스피커 대신 작은 나무 박스처럼 생긴 티볼리 오디오로 FM 라디오를 듣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노 스피커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기특한 소리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오디오 주인들의 한 마디가 곧 법이자 최고의 마케팅이던 시절이었으니 이 작은 라디오는 오디오 매니아들에게 금세 유명해졌다. 과연 스테레오 시대에 이 작은 모노 라디오가 인기를 얻었던 비결은 뭘까? 향수를 느끼게 만든 디자인? 아니면 그저 추억 때문이었을까?

 

40년 음향 역사의 압축. 티볼리 오디오




티볼리 오디오는 2000년대에 갑자기 나타난 신생회사지만 그 역사는 길다. 티볼리 오디오를 만든 사람은 헨리 크로스(Henry Kloss). 그는 1952년 어쿠스틱 리서치(Acoustic Research)를 설립하고 작은 크기의 스피커(북쉘프라고 한다.)에서 풍성하고 명료한 저음을 재생할 수 있는 AR-1 스피커를 만들었다. 풍부한 저역을 내려면 스피커 크기가 커야 한다는 게 당연한 상식이었지만 AR-1은 이 명제를 보기 좋게 뒤집었다. AR-1은 오디오 매니아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초창기부터 작은 크기에서도 깊고 풍부한 저역을 만들어 내는 노하우는 헨리 크로스를 따라 갈 설계자가 없었다.



1960년 헨리크로스는 KLH라는 스피커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가 만들었던 제품이 위 사진에 보이는 트랜지스터 FM라디오 튜너인 '모델8 (Model 8)' 이다.
오늘 소개하는 티볼리 오디오의 원형이다. 즉, 1960년대부터 티볼리 오디오의 DNA는 시작된 셈이다. KLH는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보스(Bose)와 함께 가장 대중적이고 많이 팔리는 스피커 회사 중에 하나다. 헨리 크로스는 이후에도 KLH에서 수 많은 스피커를 개발했다. 그 후에도 헨리 크로스는 에드벤트(Advent)라는 회사를 비롯해 많은 회사를 만들었고, 프로젝션 TV의 개발, 사운드 카드로 유명한 '사운드 블래스터'의 크리에이티브의 제품 고문 역할까지 담당했다.

그런데, 엄청난 이론과 설계 노하우, 그리고 부와 명성을 얻었던 헨리 크로스가 어느 순간 초심으로 돌아가 만든 제품이 바로 티볼리 오디오 모델 원 (Tivoli Audio - Model 1)이다. 이 스피커는 헨리 크로스의 모든 노하우가 담긴 걸작인 동시에 그의 유작이기도 하다. 40여년간 수 많은 스피커를 만들었지만 모델 원은 가장 편하고, 가장 간단하며, 가장 기본적인 제품이었고, 동시에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걸작이었다. 최근에는 블루투스도 들어가고 많은 파생모델이 나왔지만 그의 철학은 모델 원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잘 만든 제품의 디테일




모델 원의 스피커는 3인치 사이즈의 하나의 유닛으로 음을 재생하는 풀레인지 방식이다. 디자인 만큼이나 정말 정겹고 따뜻한 소리를 들려준다. 과하지 않지만 풍부한 저음(이를 위해 바닥면에 베이스 리플렉트 홀이 뚫려있다)과 쏘지 않는 고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시스템이 모노라는 것은 금세 잊어 버리게 된다. 심지어 방송이 있는 주파수와 주파수 사이에서 들리는 잡음도 음악적일 정도다. 미쳤다고? 실제로 들어보라. 잡음을 들어도 눈물이 난다.
 
방안에서라면 볼륨 노브 전체의 30% 정도면 올려도 충분하다. 작은 크기지만 출력이 15w에 달하기 때문이다. 작은 크기로 풍성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에는 헨리 크로스를 따라 갈 사람이 없었고 그 노하우가 모델 원에 유감없이 발휘됐다. 전면 노브를 돌릴때 움직이는 5:1 기어비의 다이얼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자극한다. 주파수가 많은 미국을 위한 설정일지도 모르겠지만, mm 이하의 단위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미세하게 주파수를 조절할 수 있다. 그 미세한 손맛은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다. 볼륨 노브 아래쪽에는 수신감도를 보여주는 LED가 있다. 감도가 좋을수록 불빛이 밝아진다. 마치 라이카 M6의 노출계를 닮았다. 역시 잘 만든 제품은 디테일이 강하다.



후면을 보면 잘 만든 제품이란 느낌이 더 강해진다. 작은 FM 라디오일 뿐이지만 내장/외장 안테나를 선택할 수 있고, 3.5mm 스테레오 폰 잭 출력(이어폰을 위해)과 같은 커넥터를 사용한 입력은 물론, 레코드 출력 까지 달려 있다. 전원은 220v와 12v 어댑터를 모두 쓸 수 있다. 난청 지역이 아니라면 굳이 외장 안테나를 연결할 필요는 없다. 지하 스튜디오에서 철문을 닫고도 꽤 높은 수신율을 보여준다. 지하 2층까지 내려간다면 외장안테나 연결이 필요할까? 다만 아날로그 방식이기 때문에 PC에서 발생하는 노이즈가 그대로 흘러 들어가는 경우가 생긴다는 이야기도 있고, 난청 지역에서는 꽤 긴 안테나를 연결해 줘야 겨우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게다가 모노기 때문에 수신율이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뿐 스테레오가 되면 수신율이 떨어질 것이란 평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조차도 시기심처럼 느껴질 정도로 음질은 만족스럽다.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기본으로 돌아오다. 


[모델원에 이어 나온 '모델2'는 그냥 모노스피커다. 이 모노스피커를 모델원에 연결하면 비로소 스테레오가 된다.]


2000년 헨리 크로스는 이 제품을 선보이면서 말했다. 
"이 새로운 라디오로 많은 사람들이 가정이나 사무실 등, 어느 곳에서나 좋은 음악을 들었으면 좋겠다. 티볼리 오디오는 이를 위해 40여년 간 노력한 결과의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헨리 크로스는 많은 오디오를 만들었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은 너무나 편하고 쉬운 제품이었다. 그는 오디오가 거추장스럽고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즐겁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삶의 일부이길 원했다. 이 라디오는 녹음 버튼도 없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로 들을 수도 없다. 어디에든 올려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다. 전원을 켜면 그냥 설정할 것도 없이 바로 음악이나 DJ의 멘트가 시작된다. 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들리는 음악은 너무나 따스하고 명료하다. 오디오를 지우고, 음악을 남겼다.
그게 티볼리 오디오의 모델 원이다.



글 : 고진우, 편집 : 김정철 - 이 글은 컬럼니스트의 의견으로 더기어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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