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소니 퀄리아 – 소니의 화려했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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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소니 퀄리아 – 소니의 화려했던 흑역사
  • by 고다르
더기어 연재 '레트로' - 과거 우리를 열광하게 했던 제품들을 다시 돌이켜 보는 연재입니다. 어떤 제품은 멋졌고, 어떤 제품은 이상했습니다. 

 
어느 회사나 소위 삽질이라 불리는 일(혹은 사업)을 하기 마련이다. 애플 역시 과거 삽질의 흑역사들이 꽤 많다. 하지만 이런 제품들이 단순히 삽질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실패를 통해 배운다는 말처럼, 분명 의미 있는 실패도 있다. 그러나 사대강처럼 의미 없는 삽질도 많았다.
소니의 삽질이라면 역시 퀄리아(QUALIA)다. 분명 퀄리아는 실패 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소니 제품 중에는 퀄리아의 DNA를 물려 받은 제품이 있기도 하다. 그것 때문에 일부 마케팅 관련 서적에서는 소니 퀄리아를 굉장히 성공적인 리브랜딩 사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극히 일부 제품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제품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 하고 싶을 정도다. 소니의 퀄리아의 흑역사를 차근차근 집어본다.
 
 

시작부터 순수하지 못했던 목적


퀄리아(QUALIA)는 2003년 발매한 소니의 최상위 제품 브랜드. 토요타가 렉서스를 만들고 닛산이 인피니티를 만든 것과도 비슷한 리브랜드다. 퀄리아는 라틴어로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품질의 차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뭔가 거창하지 않은가? 퀄리아는 브랜드 이름처럼 꽤 거창한 정책을 유지했다. 개인은 취향에 맞춰 다양한 요구가 담긴 주문이 가능했으며, 제품의 기획과 판매는 내부의 '퀄리아 인증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했었다. 퀄리아가 등장하게된 이유는 바로 수익 때문이겠다. 다른 리브랜드도 수익이 목적인 것은 분명했지만 퀄리아는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퀄리아의 탄생 배경에는 2003년 즈음의 TV 시장이 있다. 당시 삼성전자와 샤프는 PDP와 LCD TV등 기존의 TV를 뛰어넘는 TV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상황. 반면 소니는 자신들이 잘하는 브라운관에서 고화질을 만들어 내는 연구를 계속했었다. 반면 소비자들은 PDP와 LCD를 활용한 새로운 TV 화면의 선명함에 열광하며 지갑을 열었고, 결국 소니는 2003년 4월말 전분기 대비 30%나 떨어진 수익을 발표하게 된다. 그래서 경영진이 찾은 방식은 소니와는 전혀 다른 브랜드를 통해 수익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미 토요타와 닛산이 성공했던 것처럼. 그대로만 따라가면 성공은 보장되는 셈이었다. 
 
 

럭셔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급조한 브랜드

 
퀄리아 브랜드를 달고 나온 제품의 첫 출시일은 주가가 파토난지 겨우 두 달 뒤인 2003년 6월 말이다. 모델명은 015, 016과 같은 숫자를 사용했다. 문제는 이 숫자의 배열은 모두 제각각이라는 것. 세번째 제품은 017이 아닌 004다. 인과관계도 없다. 그냥 각 부서에서 모두 개발을 시작해서 먼저 나오는 순서대로 출시한 듯 하다. 그리고 딱 10개의 제품이 나오고 퀄리아 브랜드는 공식적으로 단종되었다.
 

1. 처음부터 시원하게 말아먹은 퀄리아 015

 
015(2003년 6월 출시)는 CRT 모니터. 브라운관 TV에 대한 연구를 꽤 진행했던 그들이니 어쩌면 이건 당연했겠다. 더 깊은 블랙과 레드 컬러를 표현했기에 전문가용으로 수요가 있기는 했지만 무게가 무려 96kg에 육박했다. 여기에 전용 스탠드와 스피커를 붙이면 110kg는 가뿐히 넘어가는 육중한 제품이었다. 게다가 가격 역시 무거운 84만엔(약 776만원)이나 되었다. 물론 10년전 가치라면 지금보다 더 비쌌다. 출시와 함께 사람들은 욕을 시작했다.
그러나 015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2. 허세의 극치, 퀄리아 016


 
디지털카메라인 016(2003년 6월 출시)은 더 크게 욕을 먹었다. 소니 사이버샷 U시리즈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제품이었는데 가격은 39만 9천엔(약 370만원)으로 당시 보도용 최상급 카메라와 비슷한 가격이었다. 겨우 200만 화소의 이 카메라는 단렌즈에 초소형이라는 장점은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 값어치는 아니었다. 워낙 작은 탓에 배터리가 오래 버티지 못해 배터리를 세 개나 제공했고, 너무 작아서 부족했던 기능을 액세서리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커다란 가방에 넣어서. 그러다보니 오히려 DSLR보다 휴대가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액정에 색번짐이 생기거나 외장 플래시 모듈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었다고. 사람들이 욕을 하다가 지칠 무렵 소니는 지치지도 않고 또 일을 저질렀다. 

 

3. 구라 스펙의 퀄리아 004


 

시작은 좋았다. LED 프로젝터인 004(2003년 8월 출시)는 뛰어난 밝기와 선명한 화질을 보여주었고,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풀HD를 지원했다. 굉장히 앞서가는 스펙의 제품과 화질을 자랑하는 대신 가격은 무려 252만엔(약 2320만원)이나 되었다. 또한 풀HD지만 1080p가 아닌 1080i만 지원했고 720p 대역의 지원 없이 바로 480p와 480i로 지원 화소가 내려가는 이해하기 힘든 스펙으로 욕을 먹었다. 게다가 이 제품이 출시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니는 1080p까지 지원되는 프로젝터를 훨씬 저렴한 가격에 출시해 욕을 넘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욕을 먹다가 지친 소니는 다음에는 그나마 정상적인 제품을 출시한다. 

 

4. 그나마 나았던 퀄리아 007


 
SACD 플레이어인 007(2003년 8월 출시)은 퀄리아의 여러 제품 중 그나마 성공을 거둔 제품이며, 퀄리아의 유일한 수확이었다. 실제로 매우 뛰어난 가격대 성능비를 자랑하는 제품으로 앰프까지 내부에 포함된 인티그레이티드 제품이었다. 성능 뿐만 아니라 작동에서도 (복잡하지만)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구동 메커니즘이 대단히 복잡했지만 소니답지 않게 큰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기적이었다. 
 


 
동영상을 보자. 마치 뱅앤올룹슨의 베오사운드 9000처럼 부드럽고 세련되게 움직인다. 또한 채널별로 100w 출력을 뽑아내며, 지금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소니 제품에 탑재되고 있는 디지털 앰프 시스템인 S마스터가 채용된 첫 번째 제품이기도 했다. 멋지게 움직이는 구동 메커니즘 때문에 가격은 80만엔이(739만원)나 되었지만, 오디오 업계에는 이보다 고가의 제품이 훨씬 많았으며, 비슷한 가격대 제품을 뛰어넘는 음질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퀄리아 브랜드가 혹시 살아나는 게 아닐까 하는 헛된 망상을 할 무렵, 소니는 멋지게 사람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것도 찰지게.

 

5. 예쁜 쓰레기, 퀄리아 017 



 
아마 퀄리아에 대한 여러 제품 이미지 중 가장 유명한 이미지다. 디자인과 재질 상으로는 퀄리아의 제품 중 가장 호화스러웠던 017(2004년 4월 출시)은 MD 플레이어. 황동을 깎아 만든 본체에 표면은 팔라듐 도금이었으며 기호에 따라 팔라듐 대신 금이나 은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재질 때문에 아이팟보다 더 스크래치가 잘 생겼다는 것. 물론 보호 케이스는 만들지 않았다. 소니도 이 제품이 보호케이스를 할 만큼 오래 쓰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어마어마한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재생 전용기기였다는 것. MD에 음악을 넣으려면 녹음이 가능한 MD 플레이어를 또 사야만 했다. 마치 녹화기능이 없는 비디오와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가격은 18만 9천엔(약 175만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 제품이 출시된 시기는 2004년인데, 이 당시는 아무도 MD를 듣지 않던 때이고, 소니마저 MD의 차세대 포맷인 Hi-MD 미디어를 발표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1GB 용량이었다. 반면 017은 305MB 용량의 MD 디스크만 재생할 수 있었다. 셀프 디스의 결정판이었다.

 

6. 껍데기만 바꿨던 퀄리아 010




017의 다음 제품은 헤드폰이었던 010(2004년 7월 출시). 주문자의 머리 크기에 맞춰 헤어밴드를 만들고 재질은 천연가죽을 사용했다. 또한 CD에 비해 재생 대역이 훨씬 넓은 SACD 규격에 맞춰 5Hz~120,000Hz 까지 재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격은 26만 2500엔(약 240만원)
문제는 골드문트 - 필립스 CD플레이어와 유사한 사태(가격 차이는 몇 십 배지만 사용된 부품은 같았던)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한 사용자가 이 제품 이후 출시된 SA5000, SA3000의 음질이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들 제품을 분해해 동일한 진동판이 사용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공개해 문제가 되었다. 이후 제품 개발 담당자는 동일한 진동판이 사용된 것을 인정한 것은 물론, S급 진동판은 010에 사용하고 그 아래 급의 진동판을 나머지 두 제품에 넣었다는 인터뷰가 나와 큰 비판이 일었다. 그래도 이건 애교 수준이었고, 머리가 커서 기존 헤드폰이 맞지 않던 사람들이 꽤 주문했다고 한다. 

 

7. 앞섰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던 퀄리아 005

 
 
005(2004년 11월 출시)는 LED TV다. 본격으로 LED TV 전쟁이 시작된 것이 2008년임을 생각해 보면 꽤나 앞서갔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하지만 딱 여기 까지다. 사용된 400개의 LED는 자체 부품이 아니라 필립스의 것을 사용했다. 화질은 다른 TV를 압도할 만큼 좋다는 것이 중론이었지만 문제는 PDP보다 과한 발열과 잔상 및 번인 현상.
다행히 이를 인정한 소니는 판매된 가정을 방문하여 무상 A/S를 해줬다. 또한 해상도 문제가 불거졌다. 46인치 제품만 풀HD고 조금 저렴한 40인치 제품은 1366x768이었다는 것 때문에 많은 욕을 먹었다.

 

8. 시대의 변화를 놓쳤던 퀄리아 001


 
무려 퀄리아 브랜드의 넘버 001(2005년 1월 출시)은 허무하게도 비디오 업컨버터다. 넘버원답게 스펙도 문제가 많았다. 앞서 최고의 망작으로 평가 받은 017처럼 HDMI 입력이 제외되는 것은 물론 프로그레시브 지원 역시 빠져 있었다. 아날로그인 컴포지트와 컴포넌트 입력만 가능했었다.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로 출시된 이 제품은 최악의 퀄리아 제품으로 기록되었다. 001 넘버다운 실력이었다. 이때쯤에는 사람들도 퀄리아에게 욕 하는 것이 지겨워졌다. 

 

9. 모두가 자포자기했던 퀄리아 006



소니는 지치지도 않고 또 욕먹을 만한 제품을 출시했다. 006은 리어 프로젝션 TV. 이때쯤 소니는 퀄리아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북미 시장에서 베가 브랜드로 출시된(그것도 거의 1년 전에) 70인치대의 베가 TV와 거의 비슷한 외관을 가진 제품이었다. 심지어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TV에 비해 그다지 나은 성능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 006은 국내 최초로 전시된 퀄리아 브랜드의 제품이다. 소니코리아는 이 제품에 대한 소비자 반응에 따라 국내 출시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었는데 반응이 별로였는지 실제 출시되지는 않았다. 퀄리아는 일본과 미국에서만 판매되었던 브랜드였는데 한국 시장에 전시를 했다는 것에 대해 소니 코리아는 나름 의미를 부여했지만… 이 시기는 퀄리아의 거의 끝물이다.
 
 

10. 모두가 환영했던, 파이널 퀄리아 002


 
퀄리아 브랜드의 마지막 제품은 002(2005년 4월 출시)다. 이 모델은 모두가 환영했다. 퀄리아 시리즈가 끝났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캠코더. 59만8500엔(약 554만원)이라는 가격이었고 약 7만엔(약 64만원) 상당의 고퀄리티 마이크를 탑재했다. 렌즈는 칼짜이스 대신에 소니 것이 들어갔다. 하지만 비슷한 스펙의 HDR-FX1 캠코더보다 10만엔이나 더 비싸고 렌즈의 퀄리티도 거의 차이가 없어서 혹평이 이어졌다. 002를 끝으로 퀄리아 브랜드는 2006년 1월 공식적으로 단종되었다.

 

브랜드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퀄리아는 000이라는 세 자리 모델명으로 볼 때, 잘 팔렸다면 999개를 내놓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천만다행이다. 
퀄리아의 문제는 사람들이 가지는 브랜드에 대한 인식은 비싼 가격과 좋은 디자인, 재질과 같은 것들로만 구성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토요타의 렉서스와 닛산의 인피니티의 경우, 개발 이전 제품의 콘셉트를 잡는 단계만 1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 결과 자사의 기존 차량과는 성능은 물론 모든 측면에서 두어 단계씩 높은 수준의 차를 만들어냈다. 반면 퀄리아는 기획에서 제품이 만들어지기 까지 두 달이 걸릴 만큼 모든 것이 졸속으로 이루어졌다.  
퀄리아 사태를 계기로 당시 CEO인 ‘이데오 노부유키’가 물러나고 창사 이래 최초로 외국인인 ‘하워드 스트링거’ 사장이 CEO가 되었다. 퀄리아 브랜드가 단종된 이후도 소니는 퀄리아가 굉장한 의미가 있는 브랜드였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몇몇 제품들은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당 제품군을 멸망시켰으니까. 
다만 음향기기 쪽에서는 그나마 퀄리아의 기술이 계승되어 소니의 음악사업부를 발전시키긴 했다. 또한 단종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들 제품은 A/S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소니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소비자에 대한 예의였다. (물론 일본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함정). 심지어 부품이 단종된 경우는 다른 부품으로 수리를 해주기도 한다고 한다. 이건 나쁘지 않다. 



글 : 고진우, 편집 : 김정철 - 이 글은 컬럼니스트의 의견으로 더기어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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